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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보 의사 '장기려' 2

by david-h 2024. 4.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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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기려 박사의 아내에 대한 그의 극진한 사랑은 육체나 환경을 초월한 영혼과 영혼의 사랑이었습니다.

1950년 12월 평양의대 병원 2층 수술실에서 그가 밤새워가며 부상당한 국군장병들을 수술하고 있을 때. 갑자기 폭탄이 병원 3층에 떨어졌습니다. 국군들은 모두 재빨리 철수했습니다.

 

이 때문에 그는 사랑하는 아내와 생이별하게 되었고, 일평생 빛바랜 가족사진 한장을 가슴에 품고 아내를 그리워하며 살았습니다. 주변의 사람들이 그에게 재혼을 권했지만 그는 언제나 똑같은 말을 되풀이 했습니다.

"한 번 사랑은 영원한 사랑입니다. 나는 한 여인만을 사랑하기로 이미 약속했습니다. 나는 사랑하는 나의 아내와 영원히 살기 위해서 잠시 혼자 살겠습니다."

그가 부인을 그리며 1990년에 쓴 망향편지는 우리들의 가슴을 아프게 합니다.

"창문을 두드리는 빗소리가 당신인 듯하여 잠을 깨었소. 그럴리가 없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달려가 문을 열어보니 그저 캄캄한 어두움 뿐... 허탈한 마음을 주체하지 못해 불을 밝히고 이 편지를 씁니다."

 

미국에서 북한을 많이 도운 그의 제자가 북한 당국과 합의하여, 중국에서 장기려박사 부인을 만날 수 있도록 주선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기필코 그 기회를 사양했습니다. 

"그런 특권을 누리면 다른 이상가족들의 슬픔이 더 커진다."는 것이 그 이유였습니다.

그는 결국 빛바랜 사진을 보면서 아내를 그리워하다가 만나지 못하고 1995년 12월 25일 성탄절 새벽 1시 45분에 향년 85세를 일기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때 한국의 언론은 '한국의 슈바이처' 또는 '살아있는 작은 예수'가 우리 곁을 떠났다고 아쉬워했습니다. 그는 칠흑 같은 밤과 같은 시대에 밝은 빛을 비추며 살았습니다. 주님과 병든 사람들을 섬기면서 겸손하고 가난하고 따뜻하게 사셨습니다.

 

그가 죽지전에 남긴 유언은 "내가 죽거든 나의 비문에 '주를 섬기면서 살다간 사람'이라고 적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장기려 박사을 존경하고 칭찬하지만 그렇게 바보처럼 사는 위인이 많기를 바랍니다. 제2의, 제3의 장기려 박사 같은 사람이 많으면 이 나라는 세계에 귀감이 될 것입니다. 요즘 전공의 사태를 보며 느끼는 의사와 정부에 대한 안타까운 마음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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